십일조의 허와 실

십일조의 허와 실

한국교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분명히 가름하는 으뜸 논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십일조이다. 신학적·종교적 이견을 넘어 종종 이단시비로까지 불거지는 십일조를 현대 기독교에서도 ‘유일신 신앙’의 전통적인 종교규범’으로 인정하고 오롯이 실천해야 되는가? 아니면, 율법시대와 구별되는 신약시대의 새로운 규범에 따르기 위해서 마땅히 폐지했어야 되는가?

십일조는 신정국가인 고대 이스라엘의 재정을 떠받치는 율법이었지만, 교회 재정수입의 70%를 차지하는 십일조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종교규범’이다. 하지만 신약시대의 신학적·성경적인 관점에서 살필 때 결코 논란을 피할 수 없는 십일조는 한국교회의 ‘뜨거운 감자’인 동시에 ‘양날의 검’이 아닐 수 없다.

“유대 십일조는 예수시대의 새로운 종교규범과 가치에 반하기 때문에 당연히 폐지해야 되는 구습”이라는 날선 주장에 맞서, 종교적 기득권을 쥐고 있는 한국교회는 십일조를 교인의 절대의무이며 순종의 증거로 강조한다.

예컨대 사랑의 교회(오정현)에서는 정관까지 개정하면서 “십일조를 내지 않는 교인들의 자격을 제한한다.”는 항목을 추가하려 했고, 금란교회(김홍도)에서는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암에 걸린다.”는 저주설교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존폐를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십일조의 막강한 위력 앞에서 일부는 “기독교에서는 각자의 신앙에 따라 십일조를 결정하되,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십일조는 강요할 성격이 아니다”라는 말로 어정쩡한 중재안(?)을 내지만, 이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허언이다.

십일조는 옳든지 옳지 않든지 엄연한 ‘종교규범’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합당한 제도라면 마땅히 지켜야 하며, 부당하다면 응당 폐지해야 된다. 각자의 개인적인 호오好惡에 따라 임의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정녕 없어져야 되는 구습이며 이미 시효가 만료된 구시대적 유물인가? 십일조의 존폐 이유와 명분에 대해 분명히 대답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십일조의 존재이유’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십일조가 지니는 ‘종교형식’과 달리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를 구별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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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십일조는 유대 율법주의의 이질적인 종교제도에 머물지 않는다. 토지 분깃이 없는 레위 지파와 재산이 없는 사람들, 이를테면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기 위한 율법시대의 중추적인 사회제도가 바로 십일조이다.

이처럼 십일조가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해도 율법시대가 아닌 신약시대에서는 당연히 금지해야 되는 것일까? 이는 결코 간단한 논제가 아니다. 신약시대 기독교는 분명 율법시대 유대교가 아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관점에서 예수시대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십일조를 폐지하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유대 율법시대가 지났다고 율법이 지닌 소중한 정신, 이를테면 종교를 넘어 신앙의 소중한 가치까지 동시에 버려야 하는 것일까?

종종 우리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복음과 율법으로 구별하며 이분법적 관점에서 간단히 분리하려고 한다. 물론 기독교인은 바울이 힘줘 강조했던 것처럼, 모세 율법보다 신약시대의 신앙체계, 이를테면 그리스도 복음과 계명이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도 ‘율법은 요한의 때까지’라고 선언하셨을 뿐 아니라,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옛 제사는 지나고 성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새로운 시대, 이른바 예수시대가 왔다고 하셨다.

이는 율법시대와 예수시대가 분명히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구약과 분리된 신약, 야훼와 분리된 예수 그리스도, 나아가 율법과 전적으로 분리된 복음의 일방적인 배타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둘 사이가 이분법으로 절연될 수 있다면 기독교는 야훼 신앙, 이를테면 유일신 신앙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중대한 오류에 봉착한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에베소서4:4-6)

이처럼 본질적으로 ‘하나’인 유일신 신앙의 가치와 본질이 구약시대 유대교와 신약시대 기독교의 이질적인 가치로 갈린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시대와 종교, 문화와 전통에 따라 다른 모습을 지닌, 이른바 ‘다신주의’라는 성경적·종교적 오류가 발생한다.

예수는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기 위해서 왔다”고 하시면서, 율법의 강령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사랑계명’으로 요약하셨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제시한 신약시대 복음이 구약시대 율법과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본질이 합쳐 완성된 하나를 이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된 가치가 아니며, 유대교의 하나님 사랑, 그리고 기독교의 이웃 사랑으로 갈라지지 않는다. 첫 번째 ‘하나님 사랑’에 이어 두 번째 ‘이웃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예수께서 “두 번째도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랑의 ‘우선순위’를 설명하신 것이 아니다. 요컨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본질상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율법강령이며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명백한 선언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며,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오롯이 실현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율법의 강령을 ‘사랑’이라고 하셨고,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도 “나는 (율법의) 제사보다 자비와 긍휼, 요컨대 사랑을 원한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구약에 명시되었고 예수께서도 여러 차례 인용하셨던 것처럼, 사랑은 유대 율법시대뿐 아니라 예수시대에도 절대계명인 동시에 그리스도 신앙의 절대가치이다. 결국 율법과 복음이, 그리고 율법시대의 규범과 예수시대의 그것이 종교형식에서 분명 다를망정 본질에서, 이를테면 유일신 신앙에서 파생된 유대교와 기독교의 두 신앙체계가 본질적으로 함축하는 내용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예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된다.”고 하셨다. 이는, 유대 율법주의의 구습인 십일조의 형식, 이를테면 밭 소산의 십분의 일을 의무적으로 바치는 ‘옛 형식’에서 벗어나되 유일신 신앙에서, 그리고 본질상 이와 동일한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에서 명실공히 절대계명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되는 실제 가치, 이른바 ‘구제’에 집중해야 된다.

그렇다면, 십일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되는가? 십일조 논쟁의 본질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즉, 십일조를 다만 형식적인 관점에서 율법에 일치시키며 섣불리 비판하거나 폐지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유대 율법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형식과 그것의 본질적인 내용을, 이를테면 십일조의 허와 실을 구별하는 ‘신앙의 분별’에서 시작돼야 한다.

그럼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십일조가 과연 바르게 사용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만약에 십일조가 성경에서 제시한 대로 바르게 사용되지 않는다면, 분명 그것은 바른 신앙과 순종이 아닌 반성경적 오류이며 일탈일 수밖에 없다.

십일조가 헌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교회, 특히 중대형교회에서 정작 구제에 사용하는 비율은 1%에 미치지 못한다. 반면에 예배당 건축이나 첨단영상과 음향을 비롯한 호화장비, 그리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각종 문화행사와 교역자들의 보수로 대부분의 재정이 사용되며, 돈이 차고 넘치는 대형교회는 교회 곳간에, 그리고 담임목사의 ‘숨은 계좌’에 고스란히 축적되고 있다.

이를테면 한국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 의무적·강제적으로 십일조를 거둬들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선한 구제’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당과 목사를 위한 ‘악한 축재’에 악용되고 있다.

이처럼 십일조가 종교집단과 목사의 축재를 위해 ‘악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교인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악행’을 저지르며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교회의 타락은 ‘돈을 사랑하는’ 외식에서 비롯되었으며, 돈에 의한 타락은 십일조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소득의 십분의 일’이라는 일방적인 기준, 다시 말해 개인의 소득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률적인 기준의 십일조는 마땅히 폐지돼야 한다. 십일조가 제정된 당시의 유대 율법시대는 고대사회로, 지금처럼 소득불균형에 따른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십분의 일이라는 일률적인 기준이 나름대로 합리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소위 (천민)자본주의 시대는 불평등, 불균형의 시대이다. 상위 5%가 전체토지의 90%와 총소득의 대부분을 독식하며 사사로이 재산을 축적하는 반면, 하위 10%는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한다. 이처럼 빈부격차가 극심한 상태에서 일률적으로 소득의 10%를 제시하는 것은 합리적인 기준이 아니라 ‘부당한 폭력’이다.

다시 말해, 일률적인 10%를 강요하는 십일조의 형식과 허는 즉각 폐지하고, 많이 가진 자가 많이 내며 적게 가진 자는 적게 내되 없는 자에게는 도리어 주어야 한다.

나름의 결론을 말한다. 고대 율법주의의 유물로서 이미 시효가 만료된 십일조의 허와 형식은 버리되, 신구약시대를 통틀어 영원불변의 절대계명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십일조의 근본정신인 실과 사랑, 이를테면 가난한 이웃을 섬기기 위한 구제는 시대와 종교를 넘어 반드시 지켜져야 된다.

십일조의 허와 실을 구별하지 않는 채 섣불리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이중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자체가 마치 신약시대의 바른 순종인 양, 십일조 폐지를 빌미 삼아 나눔의 정신까지 저버리며 개인적인 일탈이다.

또한, 십일조를 거부하면서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절대계명까지 덩달아 무시되는 심각한 오류이다. 마치 더러운 욕조의 물을 버리면서 욕조 안에 있던 소중한 아기까지 내다버리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십일조의 허와 실, 반드시 구별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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