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있는 권세’, 목사에게 복종하라…?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분명히 바울의 서신인 로마서에 있는 구절인데, 아마 신약성서를 통틀어 이 구절만큼 해석이 분분한 구절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하나님의 본성을 너나없이 ‘사랑’과 ‘정의’라고 말하는데 반해서,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말은 결코 사랑과 정의에 상응하는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사랑과 정의를 강조하는 하나님의 영적 권세에 복종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분명히 세상의 권세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권세가 영적인 권세, 또는 하나님의 정의와 부딪칠 때 그리스도인은 어떤 판단과 해석을 해야 하나? 물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간단히 말하겠지만 그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의 악한 권세를 따르면서도 흔히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거나 “권력이 정의다”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국가를 전복하는 쿠톄타가 불의일망정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위에서 주신 권세’로 하루아침에 둔갑한다는 말이 아닌가. 이는, 불의가 권력에 의해서 졸지에 정의로 변하는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권세에 복종하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이 숱한 논란을 부르는 만큼 본문을 다시 정독하면서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1-2)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라는 말이며, 이에는 반드시 심판이 뒤따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서 이른바 ‘하나님 나라’에서 통용되는 특별한 권세를 말하는가? 다시 말해 영적인 권세를 말하는 것으로 세상의 권세를 일컫는 말이 아닌가?

사실이 그렇다면 본문을 해석하는데 문제가 있을 게 없다.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과 정의를 지키기 위한 권세라면 그리스도인은 별다른 문제없이 당연한 계명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은 영적인 권세가 아니라 분명히 세상 권세를 명시하고 있다.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바칠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13:6-7)

성경에 기본적인 상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조세와 관세’가 이스라엘의 성전세나 십일조 같은 종교세가 아니라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더욱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죽음을 기다리던 바울이 뜬금없이 유대 종교세를 입에 담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반론의 여지없이 바울은 로마 제국에 바치는 조세와 관세를 말하고 있으며, 이는 세상의 정치적 권세, 그것도 로마 제국의 지배에 순순히 복종하라는 주장처럼 들린다. 바울의 개인적인 견해라면 사실 크게 문제될 게 없다.

아무리 위대한 사도인들 본성상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개인적인 ‘정치관’으로 대체하는 순간, 그의 사사로운 주장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구절이 성경에 엄연히 기록되었고, ‘성경의 사람’(man of the Book)인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명령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성적으로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본 절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시도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엄연한 현실에서 교회를 지키기 위한 바울의 뜻 깊은 충정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심지어 어떤 이는 세상 권세를 인정하는 역설적 반어법을 이용해서 하나님 나라의 영적 권세를 뒤틀어 부각시킨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타협적인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불의인 줄 알면서도 로마의 박해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바울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가 세운 교회는 처음부터 타락한 교회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로마 제국은 어떤 나라인가? 이스라엘을 둘러싼 5대 제국은 이른바 공중권세를 장악한 사탄의 상징이 아니던가.

가증스런 불의를 용인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가 아니라 타락한 정치권력과 야합하는 ‘강도의 소굴’에 지나지 않으며, 예수께서 유대 성전의 타락을 지켜보시며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무섭게 일갈하셨던 시점으로 역행하는 것이다.

바울이 실제로 로마의 끔찍한 박해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마지못해 정치적인 타협을 시도한 것이라면 이 구절은 두 말할 것 없이 성경에서 삭제했어야 하며, 사실은 그 이전에 이미 바울은 이런 치부를 결코 자필 서신으로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말을 결코 세상의 불의를 용인하는 정치적인 야합으로 해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나는 이 구절이 수사학(rhetorics)의 반어법을 이용해서 바울이 교회의 영적 권세를 에둘러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식의 자의적인 해석은 의미상 심각한 모순을 드러낸다. 세상의 ‘열등한’ 권세도 마땅히 지켜야 하는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한’ 권세에 대해서는 모름지기 ‘절대 복종’이 있을 뿐이라는 바울의 생각을 나름대로 설명했다는 주장이겠지만,

이는 해석을 위한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권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때로는 선악, 또는 진위라는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상호보완이 아니라 대립 관계로 서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악과 진위라는 본질을 버리고 우열과 효과라는 부수적인 형식을 선택할 때 그 결과는 치명적인 오류를 낳는다. 예를 들면, 바울이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로마 권력과 타협했다지만 로마의 박해는 전혀 멈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이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실패한 작전’으로 성경해석의 오류를 대충 얼버무릴 수 없다. 반어법을 이용해서 메시지를 강조했다는 해석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의 권세와 하나님 나라의 권세,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교회의 권세는 간단히 양립하지 않는다.

세상의 물리적인 권세가 영적인 권세와 상충하는데 무턱대고 세상의 권세에 복종할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본문은 분명히 세상의 권세에 복종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권세에 맞서는 세상의 권세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엄연한 불의이며 불순종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반어법을 이용한 메시지의 강조라는 자의적 해석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따라서 본문을 전통적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없다. 바울의 정치적인 타협이나 의미론적 강조를 간단히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구절에 대해서 나는 문체론적 분석을 통해서 의미를 해석한다. 즉,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과 ‘권세자’ 또는 권력자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뚜렷이 구별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에 본문이 ‘권세자’에게 복종하라는 의미였다면, 누구보다 먼저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된다. 예수는 헤롯왕을 ‘여우’라고 비난했는가 하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심지어 대제사장에게 순순히 복종하기는커녕, 생명을 바쳐가며 거침없이 맞섰다. 왕과 대제사장은 정치적, 종교적 의미에서 대표적인 권세자가 아닌가.

그러나 권세와 권세자의 의미를 분명히 구별할 때 본문의 해석은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즉, 왕의 자리와 대제사장의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에 해당하되, 왕과 대제사장이라는 개인은 언제나 권세에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왕에게 주어진 권세에서 벗어나 전횡을 일삼는다면 왕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권세를 제멋대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헌법을 유린한 독재자를 우리는 ‘권세’를 바르게 사용한 지도자라고 말하지 않고 독재자라고 부른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세에서 벗어난 일탈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아니라는 말이다.

대제사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켰다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실천하는 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만, 율법을 어기고 자신의 종교적인 권력과 탐욕 때문에 율법을 유린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자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사실상 위에서 주신 대제사장의 ‘권세’를 가진 자가 아니라 종교권력을 찬탈한, 타락한 종교권력자에 지나지 않는다.

권세와 권세자를 엄밀히 구별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돼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왕은 왕의 자리에 주어진 권세를 사용할 수 있을망정 자기가 권세를 만들 수 없다. 마찬가지로 대제사장은 ‘사제의 권세’를 지니되 제멋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유린할 수 없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 이른바 ‘위에서 주신 권세’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권세로서 하나님의 뜻에 반하기 때문이다.

결국,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말은 세상의 타락한 ‘권세자’에게 굴종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세에 복종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질서를 존중하라는 뜻이다. 예수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했던 것은 로마 제국에 대한 맹목적인 굴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통용되는 ‘법’을 준수하라는 말이며, 법이라는 ‘권세’에서 일탈한 불법에 하릴없이 복종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법이나 제도가 완전하기 때문에 마땅히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법과 제도가 하나님의 정의에 반한다면 우리는 악법과 불합리한 제도에 맞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법과 제도가 세워질 수 있도록 세상의 타락한 권력에 맞서 결연히 싸워야 한다. 다만, 정해진 법과 제도를 무턱대고 거역하는 것은 가치 있는 새로운 법과 제도의 가치마저 부인할 수 있는 빌미가 된다.

이 글을 쓰고자 했던 본래의 의도로 돌아가서 글을 마무리한다.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을 허투루 인용하면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인들을 목사의 권위에 굴복시키는 구실로 이용한다. 다시 말하지만, 목사는 처음부터 권세자도 아니거니와 본문을 목사의 권세를 보장하는 허튼 방패막이로 오용할 수도 없다. 예수는, 그리고 성경은 목사(목동)이라는 신분에 대해서 ‘낮은 자’라고 말하고, ‘종’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인 목사에게는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 있을 뿐이다. 목사의 영적 권위는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물리적인 권위를 모두 버릴 때, 다시 말해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매고 섬기는 종의 직분을 다하는 자에게 주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다. “높아지려 하는 자는 낮아져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자는 이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위에서 주시는 권세’는 특정한 인간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직분과 역할에 부여하며, 법과 제도를 통해서 실천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성상 교만하며 끝없는 욕망을 지닌 존재로서, 언제든지 권력을 남용해서 이기적인 욕망의 도구로 변질시킬 수 있다. 국가를 통치하는 권세는 특정한 개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헌법에 부여하며, 통치자는 헌법에 준해서 국가를 운영할 때 비로소 ‘위에서 주신 권세’를 사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목사에게 주어지는 모든 권한은 목사라는 개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정관에 명시된 규정에 준해야 하며, 정관은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바르게 제정돼야 한다.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목사는 자신의 권세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위에서 교회에 주신 권세’의 실체인 교회법과 제도를 순순히 따르면서 겸손한 자세로 목회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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