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목사의 양이 아니다

성도는 목사의 이 아니다!

‘교회개혁운동가’… 지나치게 과분한 이름으로 나를 수식하는 형제들이 있는데, 나는 스스로 ‘교회개혁운동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단순히 겸손 때문이 아니다. 물론 ‘성경적인 교회운동’이 포괄적인 의미에서 교회개혁이 될 수 있겠지만, 내가 주창하는 아르케처치 운동의 본령은 ‘교회개혁’이 아니라 ‘교회회복’이다.

요컨대, 참담히 무너지고 있는 한국의 목사교회를 나름대로 개혁해서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재건운동’이 아니라 예수께서 선언하셨던, 그리고 당신의 존귀하신 생명을 바쳐 세우신 교회를 온전히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제도적인 개혁이 아니라 ‘의식의 대전환’이다.

다시 말해, 썩고 퇴락해서 하릴없이 무너지고 있는 ‘목사교회’를 부여안고 골골댈 일이 아니다. 주께서 말씀하셨듯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모두 남지 않고” 옛 성전, 가짜 교회가 모두 무너지고 ‘진정한 교회’가 오롯이 세워져야 되기 때문이다.

개혁과 회복이 결국 ‘도긴 개긴’이 아니냐며 비판, 심지어 조롱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교회개혁과 교회회복은 ‘근본’이 다르다. 교회개혁은 타락한 기존 교회에서 드러난 ‘윤리적인 문제’, ‘종교적인 일탈’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다.

즉,  기존 교회를 보다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교회, 요컨대 ‘율법적인’ 교회로 로 돌이키는 것이 목적인 동시에, 뚜렷한 방향과 정점이 없이 시대 상황과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개혁돼야 하는 한계, 이를테면 무한 반복의 틀에 갇히게 된다. 

반면에 ‘교회회복’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교회로서 성경적인 교회가 반드시 나아가야 하는 하나의 뚜렷한 목적과 분명한 방향이 있다. 예수께서 ‘내 교회'(마16:18)라고 명명하신 그 교회는,

지금처럼 종교주의적· 권위주의적 · 율법적인 교회가 아니라 성경에 제시된 그대로 예수가 머리이며 성도가 지체가 되어 하나의 몸으로서 교회를 이루는, 이른바 성경적인 원형교회(아르케처치)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내 교회’라고 선언하신 교회, 이를테면 성경적인 원형교회를 교회의 본으로 삼는 아르케처치는 타락한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일탈에 대한 비판에 앞서… 한국교회의 정체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성경적인 기준에 따라 참 교회과 거짓 교회의 구별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기존 교회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이며, 오직 예수가 머리이신 교회’라면 응당 성경적인 원형교회의 본으로서 아르케처치가 주창하는 교회와 근본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기존 교회가 과연 주께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셨던 그 교회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먼저 분명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가 머리이신 교회는 기존 교회들처럼 결코 ‘사제교회’나 ‘목사교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머리이신 교회에서는 교회의 ‘몸’을 이루는 모든 성도가 ‘지체’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체인 성도는 오직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할 뿐, 어떤 경우에도 목사나 기타 교회권력자의 사사로운 명령에 굴종하는 맹신도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목사들에게 당부한다. 목사와 교인은 너나없이 교회의 지체로서 동등한 지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의 속성상 부득불 서열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교인들이 종인 목사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세상에서 지극히 낮은 자로 양들을 섬기는 자에게 주시는 보상은 부와 명예, 지위 같은 세상의 상급이 아니다.

요컨대 예수가 머리이신 교회, 이른바 성경적인 원형교회로서 아르케처치의의 모든 사역자는 예수의 종이다. 따라서 ‘머리’이신 예수의 명령을 받아 ‘몸’을 돌보는 낮은 자가 돼야 한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고 먹이라”고 말씀하셨던 구절, 특히 그에 이어지는 구절을 깊이 묵상하라. 이는 ‘제자도’, 나아가 사역자로서 종의 길을 뚜렷이 밝히신 것이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7-18)

무슨 뜻인지 아는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양을 치고 먹이라고 하신 구절에 대해서 대부분의 독자들이 ‘베드로는 목자이며, 무리는 양’이라고, 나아가 목사는 목자에, 그리고 교인들은 양에 해당한다고 간단히 얼버무린다. 따라서 양(교인)은 응당 목자(목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한국교회를 ‘목사의존신앙’으로 이끌며, 마침내 타락의 깊은 수렁에 빠뜨린 치명적인 오류들 가운데 하나이다. 성경을 천천히 묵독하며, 의미를 되새기기 바란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양을 ‘주시며’, 네 양을 치고 먹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맡기시며’ ‘내 양’을 치고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내 양은 ‘예수의 양’이라는 말씀이며, 그렇다면 베드로는 양의 주인이 아니라 주인의 양을 치고 먹이는 종이라는 말이 아닌가.

다시 강조하되,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양(교인)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주인이며, 이 양들은 너의 소유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내 양’이라고 말씀하신 순간, 의미상 ‘완전한 반전’이 있다. 주께서 말씀하신 ‘내 양’, 이른바 하나님이 예수께 주신 양들은 때가 되면 ‘살이 찢기고 털이 벗겨지는’ 비참한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이 소중한 자녀로 선택하신 (영적) 이스라엘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목자’와 ‘양떼’로 비유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자신의 생명을 ‘대속 제물’로 바치신, ‘양’이었다. 뿐만 아니다. 재림하시는 주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양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 편에 두겠다.”(마25:33)고 말씀하신 구절에서 보듯이, 성경은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서 양은 구원받은 자녀를, 염소는 버림받은 자를 가리키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양과 양떼는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키는 대표상징이며, 예수께서 ‘내 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새 언약 시대의 구원받은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처럼 ‘목자’로 부름 받았다고 주장하는 개신교 목사의 성서적 역할은 무엇인가?

사역자는 주의 종이며, 주의 종은 생명을 바쳐 주인의 뜻에 따르는 자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양을 치라고 말씀하신 예수는 즉각,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셨던 것이다.

저자 요한은 이에 대해 구체적인 해석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다”. 이는 달리 말해, 베드로에게 종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키고 섬기기 위해서 기꺼이 죽으라는 말이 아닌가.

이 구절은 예수께서 자신을 일컬어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 구절과 의미가 상통하는 ‘병행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께서 말씀하신 목자는 양을 위하여 기꺼이 생명을 바치는 자이다.

입으로는 ‘주의 종’으로 소명을 받았다는 자들이 정작 종으로 교회를 섬기기는커녕, 행동과 의식이 마치 ‘제왕’처럼 교인들을 지배하며 교인들 위에 왕처럼 군림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처참하게 타락시킨 근본원인이다.

정리한다. 예수께서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신 것은 목사를 비롯한 사역자들에게 양의 소유권을 넘긴 것이 아니다. 다만, 양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생명을 다해 섬기라는 준엄한 명령이며, 모든 사역자들은 교인들의 상전이 아니라 종이라는 말이다.

종은 주인의 소유를 열심히 지키고 섬길 뿐 결코 자기가 마치 주인인 양 감히 소유를 주장하지 못한다. 양들을 치고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교인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아끼지 말라는 명령이다. 동시에 종이 감히 주인의 소유인 양들의 살을 찢어 자기 배를 불리며, 양의 털을 벗겨 자신의 몸을 덥히는 패악을 저지르지 말라는 말이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다”. 이는 달리 말해, 베드로에게 종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키고 섬기기 위해서 기꺼이 죽으라는 말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채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성장시켜 교인수를 한없이 늘리고,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비롯한 수많은 헌금을 강요하며 ‘자기 배를 불리는’ 바리새파적 목사들이 특히 명심해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비루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가차 없이 말씀하셨다.

“화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2000년 전에 주께서 하셨던 이 말씀이 지금 내 귀에는 “화있을진저, 너희 부자 목사들이여!”라고 들린다. 나만의 환청인가?

한국교회의 목사들에게 당부한다. 목사와 교인은 너나없이 교회의 지체로서 동등한 지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의 속성상 부득불 서열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교인들이 종인 목사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세상에서 지극히 낮은 자로 양들을 섬기는 자에게 주시는 보상은 부와 명예, 지위 같은 세상의 상급이 아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하루빨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영적 자긍심을 회복해야 한다. “소경이 소경을 따라가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의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목사를 비롯한 교회의 사역자가 바랄 것은 오직 하나, 주님의 사랑과 더불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의 구원이다. 세상에 속한 탐욕과 교만을 버리며, ‘목사우월주의’를 단호하게 뿌리치는 것이 한국교회가 살고, 교인이 살며, 목사가 사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불완전하며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기대는 ‘목사의존신앙’은 ‘우상숭배’의 변형일 뿐, 결코 그리스도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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