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혁’은 말장난이 아니다

‘교회개혁’은 말장난이 아니다

‘교회개혁운동’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너와 나의 다름이 없는 시대의 화두다. 개혁을 실천하기 위한 진정한 의지와 상관없이, 진보와 보수의 차이 없이 ‘교회개혁’은 현대 기독교인들의 명실상부한 ‘가치어’이다.

칼뱅 신학을 계승하는 보수적인 장로 교단도 자신을 일컬어 ‘개혁 교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개신교 자체가 중세 가톨릭의 치명적인 타락에 맞섰던 ‘종교개혁’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칼뱅과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교회를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라고 불렀지만, 칼뱅의 개혁교회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타락의 온상’으로 거센 지탄을 받고 있는 ‘장로교회’의 뿌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개혁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보수 교단마저 개혁이라는 구호를 마다하지 않는다. 개혁이 ‘잘못된 제도나 기구를 새롭게 고친다.’는 의미라면, 그 선언만으로 나름의 충분한 홍보 효과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의 주체와 객체가 뚜렷이 구별되지 않고, 개혁의 구체적인 대상과 목적이 분명히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인들의 입을 통해 남발되는 교회개혁은 때로는 자신들의 종교적 이익을 전파하기 위한 ‘집단 이기주의’의 도구로 악용될 우려가 없지 않다.

이를테면 교회 개혁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순전한 의미를 상실한 채 종종 종교집단에서 ‘자기 의’를 과시하는 부정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어쨌든 ‘교회 개혁’은 더 이상 특정한 종교집단의 전유가 아니며, 개혁의 대상조차 너나없이 개혁을 주장하면서 정작 개혁의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한 상태다.

개혁의 의미가 단순히 ‘제도나 기구의 개선’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머무는 순간, 개혁은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선전’인 동시에 완성이 없는 ‘미완료 진행형’에 그칠 수밖에 없다.

어떤 제도나 기구인들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변하면 마땅히 개선해야 하는 부분이 ‘다시’ 생기기 마련이다. 아무리 훌륭했던 제도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더 이상 적용되기 힘든 과거의 유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종교개혁가 칼뱅은 이미 오래 전에, “개혁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혁을 멈추는 순간, 유형의 지상 교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준엄한 경고인 동시에, 개혁은 지속적인 과정이자 수단이며 그 자체가 결코 목적일 수 없다는 한정적 의미를 함축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입에 담고 있지만 사실인즉 개혁의 결실이 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말만 무성할 뿐 개혁을 통한 실제적인 변화, 긍정적인 가치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개혁에 관한 담론이 처음부터 다시 정립돼야 하는 시점이라는 말일 것이다.

개혁은 단순한 종교제도의 개선이 아니라, 종교적인 일탈에서 벗어나서 ‘성경적인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 분명한 ‘목적’을 설정해야 한다. 요컨대 교회개혁은 ‘인위적 제도’에 지나지 않는 종교주의를 극복하고…, “내 교회(My church)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logos)’을 바르게 깨닫고 온전히 실천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영성을 되찾기 위한 개혁의 올바른 실천은 무엇인가? 종교지도자들의 불의와 타락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진 한국 교회가 ‘제도 개선’에 머무는 관습적인 개혁 운동으로 과연 교회의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을까?

물론 좋은 제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가 적지 않다. 그러나 제도는 시공에 따라 변천하는 수단이며 과정이다.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으며, 제도를 결정짓는 근본적인 요인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개혁 운동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분명한 명제처럼 굳어버린 문장, 즉 ‘기독교 역사상 가장 타락했다’는 한국 교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 ‘교회개혁’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돼야 하는가? 흔히 말하듯이 개혁은 타락한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인 방안인가?

개혁 단체들의 조사에 따르면, 교회가 부패한 가장 큰 요인이 목사들의 윤리적인 타락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목사들의 참담한 비리들, 이를테면 성추행과 재정 전횡, 논문표절과 세습, 허튼 명예욕과 권력욕 같은 세부적인 목록들에 개혁의 초점을 맞추는 실정이다.

목사들의 심각한 비리들을 지금처럼 방관하는 한 한국교회는 타락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무엇보다 목사들의 비리에 결연히 맞서야 한다는 주장에 한 치의 반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개혁 운동은 윤리적인 타락을 질타하기에 앞서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교회 개혁이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개혁의 근본적인 방향과 목적이 분명히, 그리고 정확히 설정돼야 한다는 말이다.

목사들의 온갖 비리는 가시적으로 ‘드러난 현상’인 반면에, 그런 현상들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요인이 따로 있다. 시쳇말로 깃털이 아닌 몸통이 따로 있기 때문에, 진정한 개혁은 깃털에 연연하지 않고 비리의 근원인 몸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다면 몸통은 무엇이며, 몸통에 다가서는 방법은 무엇인가? 믿음뿐만 아니라 개혁을 말할 때도 그리스도인은 도덕적인 이념이나 철학에 천착하기 전에, 율법주의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창했던 예수의 가르침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에 빠진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지만, 당대의 율법주의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는 인간의 제도이며 이념인 율법주의에 맞서 생명을 바쳐 복음을 전했다.

율법주의자들의 불의와 마찬가지로 현대 교회, 특히 메가처치 목사들의 온갖 비리와 윤리적인 타락은 분명 교회를 타락시키고 교인들을 영적 죽음의 수렁으로 몰아가는 가증스런 죄악이지만, 성직자들의 불의는 현대 한국교회만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었다.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구제의 문제부터 중세가톨릭의 면죄부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타락의 수렁으로 내몬 요인들을 살펴보면,  ‘돈은 일만 악의 뿌리’였다.

신약 시대 이전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명명하고, 제사장과 더불어 성전의 장사치들, 이른바 ‘종교상인’들을 싸잡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질타했는가 하면,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이라며 저들의 불의를 엄히 꾸짖었다.

그렇지만 예수는 율법주의의 치명적인 문제를 단지 윤리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았다. 선민의식을 지닌 유대인들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에 따라 다른 무엇보다 정결을 중시했다.

반면에 예수는 가장 정결하지 못했던, 다시 말해 윤리적으로 가장 타락했던 세리나 창녀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망정(마21:31-32), 오히려 거룩한 선민이라며 영적 자만심에 가득 찼던 바리새인들, 이를테면 외식하는 경건주의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라며 저주의 심판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율법의 전령이며 거룩한 직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들에게조차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2)며 가차 없이 심판을 선언하신 것은 윤리적인 문제를 넘어서 그들의 신앙의 이면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그들의 그릇된 신앙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거짓 신앙’인 율법주의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없다는 무서운 일갈이었다.

예수께서 율법주의의 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모두 무너뜨려지리라”며 완전한 붕괴를 선언 – 나는 이 말씀이  예언이 아니라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 하신 것은 유대인들의 타락에 대한 도덕적인 비난에 머문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를테면 구원에 관한 영적 선언이었다.

결코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타락을 소홀히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바리새인의 의, 즉 율법의 의보다 너희 의가 낫지 못하면 정녕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선행의 중요한 의미를 간과하자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은, 선행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변화되고 거듭나서 마침내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즉, 윤리에 앞서 ‘바른 믿음’을 회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라는 그리스도 신앙의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개혁은 목회자들의 비리를 고발하는 차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비리의 근원인 동시에 그리스도 신앙의 일탈인 목사의 독재권력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비리는 타락한 권력으로 뒤따르는 현상이며, 비리를 가능하게 만든 요인은 목사의 부당한 독재권력이다.

불의의 근원인 ‘권력’을 그대로 방치한 채 가시적 현상인 비리에 매달린다면 개혁은 끝내 허튼 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에컨대, 물의 근원인 샘이 이미 오염되었는데 하류의 썩은 물을 정화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법과 권력으로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세상에서도 일방적인 독재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엄정하게 분립한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기” 때문이며, 부패한 권력으로 결코 세상의 질서를 바르게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가 없는 질서는 죽은 질서이며, 죽은 질서는 세상을 살리는 생명력이 없다.

세상의 질서가 이럴진대, 세상과 구별되어 사랑과 섬김을 실천해야 하는 교회가 오히려 목사에게 목회, 재정, 사역에 관한 교회의 모든 권한을 집중시키면서 마침내 목사의 절대권력을 한껏 지지하며 천박한 목사의존신앙에 매달리고 있다.

교회의 타락은 결국 권력을 장악한 목사의 교만과 탐욕에서 비롯되었다. 교회의 모든 힘을 독점한 목사들의 전횡이 교회를 타락시킨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말이다. 다시 강조하되, 목사의 독재 권력을 타파하지 않는 한 ‘교회 개혁’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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