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목사…!

부자 목사!?

암만 생각해도, ‘부자 목사’라는 말이 내게는 수사법(rhetoric)에서 말하는 모순어법처럼 들린다. ‘예쁜 추녀醜女’가 없고, ‘키 큰 난쟁이’가 없다. 그건, ‘작은 거인’처럼 비유가 아니라면 존재할 수 없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순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고 당당히 군림하고 있다.

‘천민 자본주의’에 물든 한국의 왜곡된 경제 구조와 더불어, 부의 지나친 편중현상에 따른 빈익빈 부익부의 폐해에 대해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세상의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고 부조리에 결연히 맞서야 하는 교회조차 전혀 예외가 아니다.

교회의 부정과 불의, 결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초대교회 이래로, 교회의 양적인 성장과 더불어 가톨릭 사제나 개신교 목사들의 비리와 탐욕은 줄곧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교회에는 거의 10만에 이르는 수많은 개신교 목회자들이 있고, 그들 가운데 80%가 넘는 절대 다수가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적은 사례비를 받으며 매우 열악한 여건에서 생활하고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데, 사제나 승려와 달리 가정이 있는 목사들의 입장에서 지나친 가난은 단지 일상적인 어려움에 그치지 않고, ‘주의 종’으로서 맡은 바 영적 사역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반면에, 한국의 중대형 교회에는 이른바 ‘부자 목사’가 적지 않다. 담임목사를 비롯한 소수의 장로가 수백, 수천 억의 재정을 비밀리에 운용하는 교회들이 버젓이 존재하는가 하면, 담목의 가족들이 교회의 공유 재산을 마치 사유 재산인양 빼돌려 기업체, 학교, 선교원 등에 투자(?)하고는 해당 기관의 대표를 맡는 ‘변칙 상속’도 좀처럼 끊이지 않는다.

어쨌든, 소위 대형교회들은 대부분 교회 곳간에 켜켜이 쌓인 돈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호화 교회당이나 대형 기도원, 또는 대규모 수양원의 건축에 교회재정을 퍼붓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대형 교회가 주의 계명에 따라서 정작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재정 분담률은 평균잡아 1%를 넘기지 않는다. 그래도 대형교회들은 “아직도 배가 고프다”라며 교인들의 목줄을 죄기에 여념이 없다.

대부분의 영세 교회와 달리, 교인수가 수천 명이 넘는 중대형교회 목사들은 대개 수 억의 연봉을 받는가 하면, 용도가 불분명한 ‘목회활동비’나 ‘심방비’, ‘선교비’, ‘사택 관리비’ 등의 명목으로 만만치 않은 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면, ‘선교’라는 허울 좋은 구실을 내세우며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교인들의 소중한 헌금을 제멋대로 탕진하기도 한다. 여기에 덧붙여, 담목의 자녀들은 대부분 ‘장학금’의 명분으로 ‘해외유학’을 보너스로 지급받는다.

그저 우스갯소리인지, 아니면 실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대형교회에서 파트타임 사역자의 보수를 기준할 때 어림잡아 전임사역자는 두 배를 받고, 담목은 제곱에서 0을 하나 뺀 금액을 사례비로 받는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예를들면, 파트타임이 한 달에 100만원을 받으면, 전임교역자는 200만원이고, 담목은 1000만원이다. 실제로 목사 개인이 임의대로 운용하는 금액은 그보다 훨씬 많지만…

대형교회의 목사가 늘그막히, 나이 70까지 목회하다가 정년이 되면 교회 규모에 비례해서 어김없이 수억, 수십 억의 퇴직금을 수령하고, 담목에서 은퇴한 뒤에도 ‘원로목사’의 자리에 앉아 상왕처럼 옥상옥의 권력을 행사한다. 담임이 아니라서 교회 안에서 맡은 사역은 현저히 줄어들망정, 원로목사의 보수는 담임목사로 시무할 때와 비슷한 금액을 받는다.

결국,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해서 곳간에 어느정도 재물이 쌓이면 목사는 담임목사로서 시무 기간은 물론 은퇴한 노후에 이르기까지 가족과 더불어 평생을 ‘부자 목사’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세상에서 전혀 남부러울 게 없는 ‘철밥통’이 아닌가?

흔히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부자가 될 수 있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처럼 가당찮은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어쨌든 남달리 축복받아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무턱대고 부정할 수도 없다. 실제로 하나님은 물질의 축복을 통해서 바른 사역에 사용하라고 주문하시기도 하니까…

하지만 하나님께 축복받으면 받을수록, 은혜를 입으면 입을수록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는 다름아닌, 이른바 ‘주의 종’이라는 목사다. 주께서는 ‘가난한 자’로 세상에 오셨고, 가난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생명을 바치셨으며, 가진 자는 반드시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엄히 명령하셨다. “세상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자를 섬기는 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목사가 정녕 주의 종이라면 당연히, 그리고 기꺼이 청빈한 자가 돼야 한다.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주는 돈을 받아서 생활하는 목사가 정작 교인들은 가난에 허우적거리는데 자신은 VVIP 신분을 누리며 부자로 호사를 누리며 산다는 것은 말그대로 넌센스이며, 주의 종으로 맡은 역할에 대한 엄연한 배역이다.

부자 동네의 교회, 또는 교인이 많아 재정이 넘치는 대형교회일지라도 막상 교회 안에는 가난의 고통에 신음하는 교인들이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의 피땀어린 헌금을 받아 생활하는 목사가 남달리 부유하게 살고있다면, 그는 이미 종교를 빙자한 장사치일 뿐 결코 ‘거룩한’ 주의 종이 될 수 없다.

신성을 가리키는 ‘거룩’의 의미 자체가 종에게 전이되는 순간, ‘거룩한 종’은 청빈과 겸손, 그리고 경건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룩’은 신성神性일 뿐, 사람이 결코 따를 수 없는 불가근의 속성이라고 변론하려는가? 하나님이 친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하신 말씀은 ‘신의 농담’이었던가?

주변을 잠깐만 둘러보면, 가난해서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과 몸이 아픈데도 돈이 없어 제때 병원에 가지 못해 병을 잔뜩 키웠다가 끝내 죽음을 맞는 사람들, 반평 쪽방에 갇혀 살면서 여름에는 찌는 더위에,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에 벌벌 떨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 학비가 없어서 하고 싶은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 돈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이른바 세상의 ‘작은 자’다. 주께서 그들을 정성껏 돌보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니라”(마25:44-45)

주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주의 종들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 따라서, 목사가 정녕 ‘주의 종’이라면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종은 자신의 안락을 돌볼 틈이 없이 주인을 섬기는 자가 아니던가? 종이면서 주인 행세를 하면 그는 이미 주인의 뜻을 거스르는 불충한 자이다. 주께서는 “세상의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목사도 욕망이 있는 인간이고, 가정이 있고 자녀들이 있으니까…”, “목사도 노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부자로 살 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바람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목사가 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배부른 먹사’가 되고 으스대는 ‘귀족 목사’가 되는 순간, 주의 거룩한 계명은 세상의 조롱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거침없이 허구로 매도당한다.

부자 목사!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은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수십, 수백 억의 교회재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지나치게 호사를 누린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축복받은 종’의 당연한 권리이며 증거인양 맘껏 으스댄다. 그러나, 주님은 아시고, 그들의 실낱같은 양심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자신이 세상의 부요를 한껏 누리는 순간, 이미 자신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영성을 잃은 ‘거짓 종’이라는 사실을…

물론, 주께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예를들면, 유대 세리장으로 당대의 큰 부자였던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는 자리에서 “소유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라고 말했고, 주께서는 주저없이 “그에게 구원이 있다”라고 응답하셨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눅19:9)

반면에, 율법의 계명을 어릴 때부터 철저히 준수했던 ‘부자 청년’이 주께 ‘영생’의 길을 묻자 주께서는 재산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계명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10:21)

도대체 세리장 삭개오와 부자 청년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둘 다 구원을 원하는데 주께서는 분명히 두 사람에게 달리 요구하신다. “가난한 자에게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겠다”는 삭개오와,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명령하신 부자 청년 사이에 중대한 차이가 있다. 즉, 부자 청년에게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서 보듯이 제자, 이를테면 사역자에게 해당되는 별도의 계명이 있다.

무슨 뜻인가? 예수를 따르는 자, 이를테면 주께 온전히 헌신하는 ‘제자’에게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라는 준엄한 계명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의 종’이라는 목사는 삭개오와 부자 청년 둘 사이에서 어떤 자리에 위치하는가? 간단하다. 주의 종은 주를 따르며 온전히 헌신하는 자로서, 성경은 “많이 맡긴 자에게 많이 청구하신다”라고 이르지 않던가?

물론, 가정이 있는 오늘날 목사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던” 당시의 제자들과 무턱대고 동일한 요구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주의 종은 주께 헌신을 맹세한 자로서, 이른바 ‘일반 교인’ 혹은 ‘평신도’보다 소유에 대해서 엄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목사들의 삶이 교인들에 비해서 보다 청빈하며, 보다 겸손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한국교회가 지금처럼 세상의 혹독한 비난을 받는 이유는 무엇보다 부자 목사들의 부패와 타락에 기인한다. 청빈과 겸손은커녕 대형교회 목사들은 마치 중세 가톨릭의 타락한 사제들이 누렸던 것처럼, 그리고 종교귀족처럼 특별한 지위와 부요를 누리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목사는 부자가 돼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목사는 본디 ‘나눠주는 자’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말씀하셨듯이, 주의 종은 ‘돈주머니’를 차지 말아야 한다. 아니, 목사가 진정 주의 종이라면 돈주머니를 차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찰래야 찰 틈이 없어야 한다.

주변을 잠깐만 둘러보면, 수많은 형제들이 곳곳에서 가난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상황이 이럴진대,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안락을 위해서 ‘과부의 가산을 주저없이 빼앗는’ 부자 목사는 주를 섬기는 종이 아니라 축재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악덕 장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교인들에게 계명에 따라서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 자가 어떻게 강단에서 복음을 떳떳히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종의 참담한 외식,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불능이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주께서도 그들에게 무섭게 일갈하신다.

“화있을진저, 너희 외식하는 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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