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나 창녀가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리라…!

세리나 창녀가 정녕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

어떤 자매가 있었습니다. 남달리 예쁜 얼굴에 붙임성까지 있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꽤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빼어난 외모만 보고도 “분명히 저 여자는 좋은데 시집가서 잘 살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미인박명이라고 하던가요. 그녀의 운명은 순탄하지 않았고, 험한 인생을 살면서 주위의 게걸스런 호기심과 질투, 그리고 모함을 겪다가 마침내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까지 당하면서 그녀의 삶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홀어머니와 살던 그녀는 인생을 자포자기의 처절한 심정으로 점점 타락의 수렁에 빠져들었습니다. 룸살롱에 다니고, 매춘에 몸을 내맡기면서 뭇 남성들의 성노리개로 전락했습니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마약까지 손을 댔다가 단속에 걸려서 마침내 철창신세까지 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요? 인생의 막바지일 수밖에 없었던 감방에서 그녀는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뜻밖에, 같은 감방에 있던 여죄수에게서 말로만 듣던 ‘복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주님…, 구원을 보장받은 의인인양 거드름 피우는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보다 뭇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멸시받던 세리와 창녀가 먼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복음을 전해 듣는 순간, 그녀의 인생에 새로운 빛줄기가 비추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옥 같은 감방이 그녀에게는 차라리 천국이었습니다. 여죄수가 전한 복음을 통해 처음 만난 예수를 연인처럼 사랑하게 됐고, 그의 뜻이라면 생명을 아끼지 않고 따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오랜만에 정말 행복했습니다…

마침내 만기가 되고 그녀는 출소했습니다. 외로이 딸을 기다리던 홀어머니는 출소한 딸을 보면서 너무 기뻤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비록 출소했지만 다른 생계수단이 없었던 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달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걱정을 눈치 챘는지 얼굴에 예쁘게 웃음꽃을 피우며 딸이 먼저 말을 꺼냅니다. “엄마. 나 이제 술집에 안 나갈 거야. 몸이 조금 힘들어도 어디 취직해서 엄마랑 재미있게 살 거야. 그리고 나 이제 교회에 나갈 거야!”

엄마는 날듯이 기뻤습니다. 그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한 딸의 두 손을 꼭 잡고 주룩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느새 많이 늙은 엄마가 실로 오랜만에 흘려보는 기쁨의 눈물이었고, 환히 미소 짓는 딸의 두 눈에도 눈물이 맑은 이슬처럼 송송 맺혔습니다.

주일에 두 모녀는 손에 손을 맞잡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까운 교회에 달려갔습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반색하며 맞이하는 형제, 자매들을 보면서 정말 교회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모를 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게다가 그날 목사님의 설교제목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마치 그녀를 위한 말씀인양 목사님의 특별한 설교를 들은 그녀의 마음은 구원의 확신으로 한껏 부풀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기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처음 해보는 허드렛일에 몸은 비록 피곤했지만, 마음은 새털처럼 마냥 가벼웠습니다. 엄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두 모녀의 얼굴은 환하게 피어올랐고, 집안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이 많이 버거웠지만 고달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두 모녀는 주일을 기다리는 재미에 세상의 힘든 일 따위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두 모녀가 어렵게 맞은 행복은 영원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모녀를 대하는 교인들의 태도에서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쳐다보는 눈빛이 달라지고, 대하는 말투가 달라지더니,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이 서서히 줄기 시작하고 언제부터인가 아무도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술집에서 손님으로 그녀를 만났던 어떤 남자의 입에서 나온, “000는 몸을 파는 여자다”라는 소문이 교회 안에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발 없는 소문이 천리 간다.”고,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마침내 온 교회에 퍼졌고, 이제 그녀의 얼룩진 과거를 모르는 교인이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저 소문만 도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비웃거나 손가락질하는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수근 대고,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창녀나 다름없는 저런 여자는 교회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내뱉는 교인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예배드리고 서둘러 집에 돌아온 모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졌고,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아니, 모녀가 같이 있지 않는 곳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교회에 가는 게 점점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그녀는 교회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소망은 세리와 창녀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였기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는 건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한줄기 소망을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인들의 태도는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여자들은 그녀가 계속해서 교회에 나오면 다른 교회로 옮기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저런 여자가 교회에 있으면 아이들의 교육에도, 교인들의 영성에도 좋지 않다”고 말하며… 그녀를 대하는 목사님의 태도도 왠지 옛날과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 모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은 모녀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교회를 떠난 것이라며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모녀에 대한 소식이 교인들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 여자가 스스로 동맥을 끊고 자살했다!”라는…

조금 각색했지만,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이토록 세상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처참하게 버림받고, 모든 소망을 잃은 채 고통스럽게 죽은 여자를 자살했다는 이유로 저주하고 돌을 던지면서 다시 한 번 그녀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니면, 그녀를 자살로 몰고 간 비정한 교인들에게 엄히 죄를 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자살은 결코 용서받지 못하는 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다른 사람을 절망으로 몰고 가는 무관심과 멸시, 저주와 비난도 결코 용서받을 만한 죄는 아닙니다.

이미 사람들의 기억에서 아스라이 잊혀가지만…, 오래 전에 송파의 반 지하 셋방에서 어렵게 살던 세 모녀가 목숨을 끊었습니다. 늙고 병든 몸으로 힘겹게 식당일을 하는 60살 어머니의 변변찮은 수입으로 살아가던 한 가족이 급기야 어머니가 늦은 저녁에 집에 돌아오다가 미끄러운 빙판길에 넘어지면서 크게 다쳐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습니다.

큰 딸은 오랜 지병으로 병석에 누운 지 오래였고, 직장에 다니던 작은 딸은 간암에 걸린 아버지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끝내 카드깡과 사채에 손을 댔다가 결국 신용불량으로 낙인찍혀서 직장까지 그만둔 상태였습니다. 세 모녀는 살 길이 막막했고,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 모녀는 말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조용히 마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남은 돈을 모두 털어 흰 봉투에 70만원을 넣고, “주인아주머니,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마지막 집세입니다. 죄송합니다.” 라는 글을 남긴 채 모두 죽었습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저나 당신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어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조롱하고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자살로 스스로 생명을 저버린 살인자라고 욕하렵니까?

아니요! 마음과 몸의 처절한 고통을 이기지 못해 가슴을 찢으며 울부짖는 자들을 죽인 살인자는 저와 당신, 그리고 “마음을 다해 세상의 작은 자들을 섬기라”는 주의 뜻을 저버린 채, 가증한 ‘외식’에 사로잡혀 교회의 양적 성장과 재물의 축복에 눈이 사이비 교회와 사이비 교회의 맹신도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