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신자와 온순한 맹신도…!

온유는 온순이 아니다…!

주님은 자신을 일컬어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 라고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따라 우리도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라고 명령하셨다. 따라서 ‘온유’는 겸손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미덕일 뿐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온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전은 온유에 대해 “성격이나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라고 간단히 정의한다. 다시말해 어떤 일에도 쉽게 들내지 않고, 설령 불의나 부당한 일을 당해도 가능한한 참고 침묵하는 온순한 성품을 가리킨다.

사전은 단어의 ‘잠재적 의미’를 지정한다. 이를테면, 실제로 사용되는 용례와 상관없이 사용 가능한 다양한 의미소들을 미리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의 ‘바른’ 의미분석을 위해서 독자는  ‘쉬고있는’ 사전적 정의가 ‘활동하는’ 문맥적 의미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반드시 주목해야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온유한 그리스도인과 온순한 교인은 결코 같은 의미가 아니다. 기도와 예배, 헌금 등 종교생활 잘하고, 목사나 교회 어른들 말씀 잘 듣고, 교회의 모든 일에 절대 비판하지 않고 잘 따르는 사람들을 일컬어 ‘온순한 교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경적 의미에서 본다면 그들이 언제나 온유한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다.

교회에서는 종종 온순한 교인들을 일컬어 온유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며 올바른 교인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교회의 요구에 잘 따르고, 영적 질서에 순응하며, 종교제도에 순순히 복종하는 ‘순둥이’ 교인들이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온유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비판하지 말라’는 구절의 왜곡된 해석과 더불어 교인들을 말 잘 듣는 순한 양처럼 길들이는 유용한 빌미가 되었다.

한국 교회에서 ‘비판하지 말라’와 ‘온유한 그리스도인’을 애써 강조하는 이유는, 마치 목동이 양을 제멋대로 길들이 듯이 교회지도자들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하는 온순한 교인들을 길들이는 좋은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하지 말라’라는 문장이 사용된 구절들을 성경 문맥 안에서 제대로 의미를 살펴보면,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려 판단하거나 밝히지 말라”라는 의미의 ‘비판하지 말라’가 아니다.  다시 말해 ‘비판하지 말라’에서 사용된 헬라어 ‘krino’라는 동사는 ‘판단하다, 비판하다, 결정하다, 심판하다’ 등의 다양한 의미소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krino’가 사용된 각각의 문맥 안에서 실제 의미를 파악해야 된다. 문맥에 따라서 ‘krino’가 ‘옳고 그름을 가린다’라는 의미에서 ‘비판하지 말라’가 아니라, 때로는 ‘비방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라’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것처럼, 온유한 그리스도인 역시 성경의 문맥을 통해서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면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온순한 교인’과는 상관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로 성경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아는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불리운 다윗도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도 아닙니다(물론 그들이 온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명백히 따지면, 온유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이라는 최상급을 통해 온유의 절정을 이룬 자는 전혀 뜻밖의 인물로서, 성경에서 오히려 가장 온순하지 않았던 인물로 손꼽히는 모세이다. 동족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고 모래더미에 묻어버리고 도망쳤던 살인자 모세를 두고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말한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는가? 아무리 온유와 온순의 의미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분명히 같은 의미소를 지니고 있다고 보이는데 과격한 성품의 모세가, 살인자 모세가 어떻게 온유할 수 있을까? 성경의 온유와 사전적 온유가 뚜렷히 다르게 쓰인 전형적인 예가 된다.

‘모세가 가장 온유하다’는 난해한 문장에 대해 성경은 같은 문맥 안에서 분명히 이유를 밝힌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말하기도 하고 꿈으로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민 12:7-8)

하나님이 모세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신 근거는 다름아닌 그의 ‘충성’ 때문이다. 성경의 온유한 자는 날 때부터 온순한 성품을 지닌 자도 아니거니와, 불의에 대해서도 좀처럼 비판하지 않고 세상 또는 종교적 관습에 순순히 따르는 자도 아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을 두고 성경은 이처럼 ‘온유한 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라고 가르치신 주님의 온유는 그와 달리 온순한 성품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주님은 부당한 재판을 받으시면서 대제사장에게도, 로마 총독에게도, 헤롯 왕에게도, 심지어 군병들에게도 끝내 ‘들내지 않으셨고’ 마지막 순간까지 한 마디 불평과 원망도 하지 않으셨습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의 불의와 타락한 종교권력에 대해 일체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참으셨기 때문에 온유하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래야 온유한 것이라면, 주님은 유대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아!’라며 거친 독설을 던지지 말아야 했고,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있을진저!’라며 저주하지 말아야 했고, 성전의 장사꾼들을 내쫓으며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뒤엎는 거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했다.

주님은 유대교의 불의와 종교지도자들의 타락과 외식에 대해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은 세상에 진리를 전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치며 부패한 종교권력과 투쟁했다.

주님이 말없이 침묵했던 이유는 마치 온순한 교인들이 교회의 불의를 보면서도 침묵하듯 유대의 종교권력에 굴복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를 비우신 예수의 온유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온유는 타고난 성품으로서 온순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눈에 익고 몸에 배인 관습에 하릴없이 길들어 세상이나 교회의 그릇된 제도에 말없이 복종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온유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완악한 ‘자기’를 비우고, 탐욕에 사로잡힌 육적 자아와 자기 의에 사로잡힌 아집과 교만을 버려야 ㅘㄴ다.

그때 비로서 온유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운 자리에 또다른 세상의 가치관이 파고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자기를 비운 자리에 그리스도가 사실 때 마침내 우리는 ‘탐심과 정욕’의 자아에 이끌리지 않고 진실로 온유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갈 2:20).

그리스도인의 온유를 요약하면 한 마디로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태도를 말한다. 그때 드디어 우리는 세상의 관습과 전통에 얽매인 허튼 평안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평안 곧 진정으로 ‘마음이 쉼’을 얻을 수 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온유한 그리스도인은 부패한 교권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면서 잠깐동안 심리적인 편안함을 얻는 온순한 교인이 아니다.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때 비로서 ‘온유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도대체 무엇인가? ‘비판하지 말라’라며 침묵하거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며 마냥 참고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불의한 종교권력에 담대히 맞선 것이다.

주님이 그러셨듯이, 우리 또한 타락한 종교권력자들에 맞서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속의 탐욕에 찌들은 교회권력에 담대히 맞서야 한다.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불의와 맞서 싸우되 동요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온유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주님이 원하시는 온유한 그리스도인은 교회가 원하는 온순한 교인을 가리키는 말이 결코 아니다. 탐욕 신앙과 외형주의에 빠진 오늘날 (대다수) 한국 교회의 일탈된 모습을 바라보며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그리스도인, 즉 온유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한’ 한국교회의 불의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해야 하며, ‘성전 정화’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주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 아닐까…

“온유한 신자와 온순한 맹신도…!” 에 대한 1의 댓글

  1. 엄청난 글입니다.
    통찰력이 상당하십니다.
    평소에 생각하던 바인데 이리도 예리하게 정리해 주셨네요.
    넘의 글 잘 퍼가지 않는데
    이 글은 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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