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때와 사람의 때…

하나님의 때와 사람의 때의 불일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이토록 불의가 만연하고,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는 거짓과 타락에 물들고, 성령의 전인 인간의 삶은 속된 탐욕에 찌들어 도무지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실재를 느낄 수 없다. 처절한 고통을 이기지 못해 제발 도와달라며 애타게 기도해도 주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고, 성령의 위로도 느껴지지 않는다.

성령의 임재를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무능력을 보게 되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부재를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무관심을 느끼게 되면서 너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탄식한다.

정말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시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는 말씀처럼 사랑의 하나님이신가?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우주와 만물을 통해, 생명의 신비를 통해, 부정할 수 없는 신의 섭리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실재를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입으로 주장한다고 해서 마음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 설령 남달리 깊은 신앙심을 지녔어도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사실은 감히 말로 드러내고 표현하지 않을 뿐, 속내는 이미 조심스레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주저없이 말하면서 정작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눈으로 보이지 않고 귀로 들리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눈과 귀로 보고 듣지 못해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바람은 바람으로, 전파는 전파로, 빛은 빛의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 분의 특별한 방법으로 존재를 증거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증거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의에 대해 추상같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간절한 기도에 즉각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묵묵히 침묵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슬그머니 하나님의 무능력을 말하고, 부재를 의심하고, 무관심을 원망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시기 위해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법, 즉 세상의 불의를 심판하시고, 교회의 타락을 징벌하시고, 자녀의 기도에 흔쾌히 응답하시면 의심은 한 방에 사라지고 모두 할렐루야!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뜻과 같지 않고,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 같지 않다.  불의가 하나님 뜻이고 방관이 하나님의 길이라는 말이 아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세상의 불의에 대해 끝까지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또한 자녀의 쓰라린 고통과 간절한 기도에 내내 침묵하시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때가 사람의 때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목해야 한다. 내가 간절히 원하지만 하나님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침묵하시는 것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자녀의 처절한 고통을 외면하시면서 어떻게 사랑하신다고 담담히 말할 수 있나 반문할 수 있다. 죄와 허물이 많은 나를 아직 용서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처럼 고통을 주시지 않나 자문하며 스스로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심지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미워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며 쓸쓸히 마음을 접기까지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특별한 존재라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다시 말해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본성으로 ‘모든 당신’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다. 

내가 절망하고, 원망하고, 의심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기 때문에 그 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바람과 원을 순순히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나를 지키시고, 세우시고, 높이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과 견딜 수 없는 수욕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친히 당신의 입을 통해 예수를,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다”라고 선언하셨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살 찢기고 피 흘리며 죽어가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애처로이 외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끝내 침묵하셨다.

살릴 능력이 없어서, 사랑하는 자녀가 아니라서, 묵묵히 고난을 당하라고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시며 함께 애통하시면서도 그렇게 침묵하신 것이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을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 곧,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룩한 이름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의 순간에 오히려 침묵하셨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고통스레 외치는 순간에 하나님이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시지 않고, 죽고 삼일만에 부활하는 영광의 순간에 마침내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존재를 증거하셨습다.

하나님이 세상의 불의와, 교회의 타락과, 자녀의 간구에 마치 무능력하고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정하시는 때는 사람의 이성이나 감정으로 판단하는 때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옳은 때를 선택하신다.

아브라함을 일흔여섯 살에 만나 자녀의 번성을 약속하셨지만 정작 백 살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이삭을 주셨다. 야곱을 벧엘에서 만나 일찍이 축복을 약속하셨지만 그때부터 무려 이십 년의 고난의 세월을 지낸 다음에야 힘겹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민 이스라엘은 장장 사백 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해야 했고, 출애굽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광야의 험한 길을 돌고 돌아 무려 사십 년을 헤매야 했다. 바울을 만나 이방 전도를 위한 사도로서 귀한 사명을 주셨지만 하릴없이 그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삼년동안 고난의 시간을 거쳐야 했고,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재회하며 사도의 지위를 인정받는데 장장 십수 년의 기나긴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하나님의 때는 사람이 이성으로 판단하고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때와 같지 않다. 우리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부르셨으면 마땅히 그때부터 여건을 허락하시고 바로 사역을 시작하면 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때부터 사역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버거운 고난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때는 단순히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연단과 시험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는 고난을 견디고 시험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신앙의 승리자는 하나님의 때라는 특별한 의미를 깨닫고, 때를 기다리며 고난을 기꺼이 이기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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