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사랑과 자기 자랑…(2)

자기 사랑과 자기 자랑 (2)

자기 사랑과 자기 자랑의 명백한 차이는 무엇일까? 그저 눈에 밝히 보이는 토씨 하나의 차이일까? 그렇지 않다. 토씨의 단순한 형태적 차이가 아니라 의미의 완전한 반전이다.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인 ‘자기’라는 단어의 뚜렷한 의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의 개념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

자아는 간단히 말하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정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은 삶의 뚜렷한 가치관을 지니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삶의 목적과 방향이 극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은 육신을 지닌 생물학적 존재일 뿐 아니라 영을 지닌 특별한 존재이다.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에 대해 흔히 말하는 사회성, 도덕성, 사유 능력을 넘어서 나는 영성이라고 종종 주장했다.

비록 사람과 비교해 차원이 너무 다르고 수준이 많이 떨어지지만 다른 동물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살기 위해 동물도 상대를 인정하는 최소한의 원칙을 지니기 때문에 함께 무리지어 생활할 수 있다. 동물도 지적 능력I.Q이 있는 건 이미 잘 알져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영리한 동물일지라도 종교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예컨대 개나 돼지가 신을 부르며 기도하고 찬양할까?

반면에 사람은 처음부터 영을 지닌 존재로 만들어졌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따라서 사람은 육적 존재로서 흔히 말하는 일반적 의미의 자아를 지닐 뿐 아니라 영적 존재로서 특별한 자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아라고 말할 때 육적 자아와 영적 자아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육적 자아로서 인간은 물리지 않는 본능적 욕망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원죄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원죄는 인간이 본래 지니고 태어나는 본능적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단 욕망의 덫에 걸리면 누구든 자신의 의지만으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오롯이 믿는 사람들조차 탐욕의 수렁에 빠지면 영적인 눈과 귀가 온통 가려져 하나님의 준엄한 음성마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자기 자랑에 대해 말하면서 거창하게 인간의 탐욕과 타고난 죄의 본성까지 들먹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자랑은 탐욕과 아주 가까이 있고, 탐욕은 교만이라는 죄의 본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랑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탐욕의 수렁에 빠지고, 탐욕은 교만을 부추기며 거침없이 죄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 자기 자랑에 급급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은커녕 거짓된 탐욕의 신앙에 하릴없이 빠져들고 만다. 그럴듯하게 모습을 숨긴 탐욕은 종종 은혜처럼 모습을 가장한 채 우리에게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로 죄를 범한 아담은 생명을 주신 이,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떼어 하와를 만들었고, 아담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아내로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아담이 창조주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을 받는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6-17

아담과 하와가 풍요로운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이 유일하게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선악과’라는 나무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를 먹었던 것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 즉 본성적 탐욕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은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무서운 마성을 지니고 있다.

설령 바라는 욕망을 마음껏 채워도 사람의 마음 한 구석에는 어느새 새로운 욕망이 꿈틀거린다. 불같은 욕망이 용틀임하며, 쉴 새 없이 인간의 마음을 부추긴다. 욕망 자체가 목적이 되면서 뚜렷이 다른 목적, 즉 구체적 대상은 신기루 같은 허상일 뿐이다. 끝내 만족이 없기 때문에 욕망도 마침이 없다.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이 이끄는 대로 보고 듣기 때문에 마침내 사람의 욕망은 눈먼 욕망, 타락한 탐심과 정욕이 되는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이미 말했던 것처럼, 아담과 하와가 인류 최초로 죄를 범하며 원죄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몰랐던 무지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에 욕망이 있었고, 그들의 욕망을 읽은 사탄의 유혹에 걸려들었고, 타락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끝내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자기 자랑은 무엇이며, 자기 사랑은 무엇인가? 자기 자랑은 무엇보다 겉으로 보여지는 외형을 중시한다. 드러내고 싶고 과시하고 싶은 자랑거리들을 한껏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랑의 전형이다.

빼어난 미모, 많은 재산, 높은 지위, 남다른 건강, 특별한 재능, 빛나는 명예, 귀한 가문처럼 세상에 드러내고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욕망은 이른바 자기 자랑이며, 결코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 사랑이 될 수 없다.

자기 자랑은 있는 그대로 자기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잘난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은연중에 자신을 높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다른 사람의 굴복을 전제하고 필연적으로 우열을 가리게 된다.

결국 자기 자랑은 상대에 대한 자신의 비교우위를 과시하려는 교만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와 경쟁하고 반드시 이겨야 되기 때문에 자기 자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물리치며 그에게 아픈 상처를 남기고 만다.

‘자기 자랑’에 연연하는 사람은 상대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느끼면 그나마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상대를 편하게 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엔 사정이 달라진다. 자기를 한껏 자랑하기 위해 그 사람,  즉 상대보다 내가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탐욕과 교만의 수렁에 깊숙이 빠지고 만다.

그리고 탐욕에 빠진 자아, 즉 교만한 자아는 마침내 큰 죄를 낳는다. 상대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비방하고 증오하면서 어느새 마음에서부터 죄를 범하고 마는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자기 자랑은 이처럼 있는 그대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의 종이 되어 점점 죄악으로 몰고 가는 사탄의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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