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부'(성부)는 성경적인 재물관인가?

성부론의 거짓과 진실… 

소위 ’밀리언셀러로 대박을 터뜨린 ‘왕의 재정’의 저자 김 미진을 통해 ‘성부론’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거룩한 부의 축적과 사용’을 강조하는 단어로,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깨끗한 재물’이라는 의미의 ‘청부론’에서 한 걸음 더 나간 모양새이다.

한국교회에서 한 시절을 풍미했던 ‘고지론’과 ‘청부론’에 이어서, 의미와 형태가 조금 변형되었지만 사실은 그 밥에 그 나물인 ‘성부론’이 한국교회 뭇 교인들의 이목을 집중하며 벌써 몇 년째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성부이든 청부이든 재물이 나름의 소중한 가치가 있다 해도 ‘부의 축적’은 분명 성경적인 주문이 아님에도…, 나아가 왕의 재정이 담고 있는 내용들 역시 비성경적인 오류로 단지 ‘재물의 유혹과 탐심의 정당화’에 불과한 데도 이렇게 화려한 조명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깨끗하고 거룩한 부의 형성과 사용을 무턱대고 비난하는 건 치기어린 맹목적 비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왕의 재정을 교재로 곳곳에서 기독교 세미나가 열리는가 하면, 특히 교인들 사이에서 ‘왕의 재정 큐티 모임’이 성행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마음 한 구석에 개운치 않은 앙금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종종 가난을 ‘그리스도인의 미덕’으로 제시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부의 형성과 축적에 적이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재물의 유혹이 좀처럼 버려지지 않는 대다수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과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했기에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 아닐까.

결코 거룩함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며 정당한 부의 의미와 가치를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울리기 힘든 두 단어의 인위적 결합이 못내 미덥지 않다. ‘성부론’으로 거룩한 재물을 주장하는 이유와 동기가 과연 무엇인가?

의미의 방점이 거룩함에 있는가, 아니면 부요에 있는가? 혹시 ‘성경’과 ‘신앙’의 이름을 빌어 재물의 탐욕을 정당화하려는 숨은 의도가 아닐까.

“주께서 내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 교회에서 가장 부자가 되게 해주시면 저는 교회에서 십일조를 가장 많이 내는 교인이 되겠습니다.” 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기복신앙은 다른 종교라도 같은 목적으로, 맘몬숭배의 공통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는 자들의 속내가 과연 십일조를 많이 내는 독실한(?) 신자가 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남보다 재물을 많이 소유해서 보란 듯이 잘사는 자가 되고 싶은 탐심과 정욕의 발로인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제목의 간단한 글을 통해 이미 말한 바 있지만, 나는 ‘자발적인 가난’ 운운하면서 가난을 미화하는 거룩한(?) 자세를 그닥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구절의 문자적인 해석에 급급한 나머지, 마치 가난이 그리스도인의 미덕인 양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재물의 소용과 가치를 도외시하는 태도를 자의적인 성경해석의 오류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에 덧붙이면, 예수께서 “세상의 작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하신 것은 단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메시지로서 ‘차별적인 구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당시 유대 공동체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 자’로 낙인찍히고 사회에서 버림받고 멸시 당했던 가난한 자들도 은혜로 말미암아 ‘차별 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화자의 메시지’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재물은 그 자체로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본디 가치중립이다. 나아가 성경이 말하는 재물의 가치, 이를테면 성경적인 재물관은 재물의 많고 적음의 양적 개념이 아니라 바른 사용이라는 질적 개념에 있다.

이를테면 ‘왕의 재정’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겠다고 기도로 맹세하고 ‘하늘 은행’에 맡기기만 하면 은혜로 말미암아 이자가 3000%, 6000%, 10000%가 붙어 차고 넘치도록 많은 재물을 부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재물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바람이다.

예컨대, 성경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소유를 전부 헌금함에 넣었지만 금액은 고작 두 렙돈, 지금 화폐가치로 환산할 때 1000원에 미치지 못하는 작디작은 금액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이 가난한 과부가 너희들 가운데 가장 많은 돈을 넣었다”며, 사실상 많은 돈을 헌금했던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 저들의 말을 빌면 –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해’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가난한 여인을 도리어 칭찬하시며 은혜를 베푸셨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재물관에 대해 말하려면, 성경에 ‘세리장이며 부자’로 기록된 삭개오를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세리였던 그는 ‘성부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거룩한 부’를 축적한 자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고 하시면서 삭개오의 믿음을 칭찬하신 이유는… 그가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근거가 없이 단지 성경을 이용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성부론’에 그토록 열광하는 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진실인즉, 재물을 향해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탐욕과 더불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 맘몬숭배라고 판단하는 것은 나의 무리한 생각일까…

어쨌든…,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은 부의 축적, 다시 말해 재물의 ‘모음’에 있지 않고 많든 적든 재물의 ‘나눔’을 강조한다는 진리를 망각하지 말아야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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